설악산(1708m)공룡능선
천불동-공룡능선-마등령

<>공룡능선의 암봉 사진, 산행지도등 포함 + (산행기 텍스트) -->그래픽판

공룡능선은 마등령에서 희운각을 잇는 피라미드같은 삼각봉과 기이한 첨봉들이 퍼레이드를 벌이는 백두대간상의 가장 화려한(?)능선이다. 기봉과 기봉사이엔 깊게 가라앉은 안부가 있어서 요철이 극심하여 거리는 5-6킬로에 지나지 않지만 여간 단단한 무릎이 아니고서는 진이 빠지는 경험을 해야 한다. 공룡능선은 이제 설악산 산행을 했다고 하는 사람들이 자신있게 다녀왔노라고 얘기할 수 있는 자랑스러운 산행코스로 자리잡았다.
그래서 오로지 공룡을 다녀왔노라고 얘기하기 위해 공룡을 찾는 사람이 많아지고 있다. 지난 6월 6일만 해도 산행경험이 많지 않은 젊은이들(운동화를 신은 사람도 있었다)이 신선봉을 앞에둔 마지막 관문에서 지쳐 엉금엉금 기다시피 하고 있었다. 그러나 여름철 맑은 날은 그런대로 좋지만 날씨가 궂거나 기온변화가 심한 계절에는 능선횡단은 자칫 씻을 수 없는 과오가 될 수 있다. 특히 동절기엔 젊음만으로 도전했다가 꽃다운 나이에 설사면에 죽음을 묻는 일도 비일비재하다. 지난 1월초에도 이 능선의 눈보라에 세사람의 산꾼이 스러져 갔다.
이 능선에서는 산행을 일상화하고 있는 사람도 여름에는 4-5시간, 겨울에는 5-7시간의 산행시간을 잡아야 순조로운 산행을 할 수 있다. 산행경험이 많지않은 사람은 그보다 훨씬 많은 시간을 계산해야 한다.

<산행기>

6시에 설악동 출발. 상큼한 아침공기가 폐부로 스며든다. 비선대로 가까워지자, 더운 바람, 찬 바람이 뒤섞이어 불어온다. 동해안쪽 따뜻한 기운과 한기를 머금은 계절풍이 천불동을 훑어 내려오다가 입구쪽에서 소용돌이를 치는 것이다. 한순간엔 미적지근하다가 다음순간엔 움찔 냉기가 느껴질 정도로 바람을 쐬니 기분이 이상해진다.
천불동은 단풍이 절정이다. 5시간만에 희운각 능선에 도착. 양폭위 천당폭포까지의 협곡은 단풍, 폭포, 소, 암곡의 연속. 컬러판 축제가 벌어졌다. 지난 여름 어느날 전후좌우 모든 방향에서 폭포가 쏟아지던 폭우속의 경관과는 대조적이다. 희운각에서 신선봉으로 올라가는 능선은 이미 만추의 풍광이 소슬하다. 적황색의 색조로 물든 참나무 숲에는 설악산 특유의 강풍이 불었다. 따가운 햇살이 나뭇잎을 아름다운 색깔로 물들여 놓으면 하늬바람이 그것을 훑어 천불동 협곡의 하늘위로 잔뜩 휘몰아 간다. 그 광경을 보면 세월이 가는 쓸쓸한 뒷모습을 보는 느낌이었다.
바람에 불려 골짜기 아래로 끝없이 떨어져가는 낙엽들은 설악산엔 곧 겨울이 찾아올 것이라는 것을 예고하고 있었다. 대청봉에서 희운각으로 내려오면서 눈을 떼기 어려운 봉우리가 신선봉이다. 겸재 정선이 그린 “금강산도(金剛山圖)” 같은 비죽비죽한 암봉 신선봉. 이 봉우리에 한번 올라 천불동을 내려다 보고싶지 않은 사람은 없을 것이다. 신선봉 정상에 올라갈 시간도 장비도 없다. 그래서 맨 앞에 있는 봉우리의 올라갈 수 있는데까지 올라가 천불동 계곡중 천당폭포 위쪽일부를 내려다 보았다. 숲처럼 늘어선 암봉과 골짜기들이 봉만의 웅장한 모자이크를 이루었다. 천불동쪽으로 바짝 다가선 암릉으로 하여 천당폭포일대의 풍경을 내려다 볼 수 없어 아쉬웠지만 단풍든 나무와 청솔나무를 어깨에 이고 절리로 균열된 입석들이 어깨를 부비듯 솟아오른 신선봉의 능선갈래 그자체도 절묘한데다가 그 뒤로 보이는, 절리의 모든 흐름이 천불동 상단쪽 계곡으로 향하고 있는 암벽이며, 암릉이며, 침봉들을 보니 환상속의 설악산도 이보다 기묘할 수는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설악산 엣센스적인 경관을 바라볼 수 있는 최적의 전망대- 그 위에 서 있었던 것이다.
물론 가장 좋은 전망대가 있다면 그것은 신선봉 정상일 것이다. 물론 공룡능선의 능선봉들도 좋은 전망대가 될 수 있다. 그러나 대청봉, 양폭에 가까운 신선봉이야 말로 천불동의 대부분, 가야동, 만물상, 용아장성을 바라보기에 최적의 조망처인 듯했다. 바위틈 사이로 보이는 천불동은 말문을 잊어버리게 만들었다. 침식과 절리가 형성한 바위의 화려한 장관이었다. 대청봉에서 천불동을 바라보면 비죽비죽한 암봉과 협곡, 단애와 암릉으로 가득한 계곡경관에 모두가 탄성을 발한다.
그러나 대청봉에서 천불동을 보는 경관은 원경에 가깝다. 대청봉의 높이 때문에 천불동의 암봉들은 모두 ‘저아래 내려다보이는' 경치일 뿐이다. 그러나 신선봉에서 내려다보면 천불동은 근경으로 다가서 있어 조물주의 섬세한 노작을 지근거리에서 바라볼 수 있다. 이곳에서 내려와서 신선봉 왼쪽으로 돌아 신선봉정상으로 올라가려고 애를 썼는데도 어느 개구멍받이 같이 뻥 뚫린 바위사이의 구멍을 통해 천당폭포 아래쪽 협곡의 일부를 본 것이 고작이었다. 그 위로 더 올라가 조금이라도 천불동 능선을 타보고 싶은 바램은 실현할 수가 없었다. 천불동쪽 능선으로 내려가본다는 바램을 실현할 수 없었다. 5시간에 걸친 천불동-희운각 코스와 신선봉을 오르내리며 보낸 한시간이후 체력은 급격히 떨어졌다. 희운각 안부에서 신선봉으로 올라가는 길은 꽤 가파르지만 신선봉정상 바로 아래에서 한동안은 비교적 평탄한 능선길이 되므로 신선봉 정상으로 올라가려고 애를 쓰지 않아도 된다. 그래도 정상에서 천불동쪽으로 뻗은 능선으로 내려가보고 싶었던 오랜 바램을 바람에 날려버려야 하니 아쉬웠다.
공룡능선을 신선봉이나 반대쪽인 마등령에서 보면 왜 이 능선이 그런 무시무시한 이름으로 불리는지 알 수 있다. 그리고 공룡능선 위라면 어느 곳에서라도 그런 느낌을 경험할 수 있다. 하지만 신선봉을 지나 1275봉이 보이는 암릉에 서면 마치 마천루의 거리를 걷고 있는 듯한 환상을 갖게 하는 곳이 나타난다. 마치 마천루아래 길바닥을 걷거나 마천루 위를 걸어가는 짜릿한 느낌을 준다. 공룡에서 천불동이나 가야동을 내려다보는 시각보다 공룡적인 능선봉들을 수평으로 바라보는 것 이상으로 압도적인 공룡능선 산행의 시각적 즐거움은 없다. 신선봉에서 비교적 평탄한 능선길을 가면 신선봉 높이만한 암봉이 있고 그 암봉 옆으로 급경사 내리막길이 나오는데 이곳에서 1275봉과 나한봉이 마천루처럼 일직선으로 서 있는 숨막히는 경관이 펼쳐진다. 1275봉에서 범봉으로 이어지는 암릉까지 포함하는 것은 물론 멀리 마등령의 세존봉까지 포함하면 원뿔첨봉들의 전시장같은 곳이다. 이곳에서 1275봉까지는 비교적 평탄한 안부형 능선이어서 경관을 방해하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 1275봉에서 범봉에 이르는 릿지등반을 한다면 천불동 일대의 첨봉들까지 볼 수 있어 그런 느낌을 더 강하게 받을지도 모른다. 여하튼 1275봉에서 마등령까지 1200미터급 암봉과 침봉 4-5개가 퍼레이드를 하듯 한꺼번에 정렬한 장면은 숨이 막힐 정도로 기괴한 느낌을 주는 경관이었다. 조물주의 솜씨앞에 잠시 저절로 마음이 숙연해지는 곳이다.
능선의 평균고도가 1100미터라면 100미터 내지 150미터를 넘는 원뿔들이 5-6킬로정도 되는 거리에 차례로 서 있는 광경은 설악산에서 가장 아름다운 경치라고 말해도 좋을 듯했다. 그것은 경관이라기보다는 모뉴멘트들의 전시장이었다. 영국의 스톤헨지 거석문화유산의 땅을 지나는 기분이 바로 그런 것일 듯했다. 지난번 공룡능선 산행때도 분명히 보았으련만 전혀 기억된 게 없는 게 이상하다. 그때엔 정신못차릴 정도로 공룡의 위세에 압도당했던 모양이다.
이후 공룡능선은 급경사 오르기와 내려가기의 격렬한 반복이 주는 고통스런 산행의 연속이었지만 간혹 안부에 올라가면 가야동 계곡에서 지계곡을 타고 훑어 올라온 그 강풍에 단풍 물든 무수한 낙엽이 실려와서 천불동쪽으로 마치 조그만 엔진을 단 비행체처럼 떠가는 것을 구경하면 피로가 풀리곤 했다. 가야동 계곡과 구곡담 계곡을 가르는 용아장성이 왼쪽으로 보였다. 공룡능선만큼 높지는 않지만 수렴동에서 시작하여 고도를 높이며 봉정암-소청봉으로 이어지는 능선을 보면 문자 그대로 톱니바퀴같다. 용의 이빨은 애교있는 이름일 뿐 능선의 인상과는 걸맞지 않는다. 역광으로 보이는 용아장성은 멀리 산록에 형성된 장대한 성곽같았고 난공불락의 성채 같은 위엄을 보이고 있다. 골짜기 바닥에서 서서히 높아지는 그 톱니같은 능선은 기울어진 햇살 속에서 한편으로 꿈결같으면서도 한편으로 범접이 불가능한 옛 강국의 요새처럼 보였다.
공룡능선은 그 이름이 주는 인상에 비해 특별히 올라가기 어렵다거나 하는 곳은 없지만 높낮이 굴곡이 심한 능선으로 웬만한 건각들이 아니면 빠른 시간에 주파하기가 힘든 코스이다. 특히 1275봉과 나한봉의 오르막길은 가위 살인적이다. 유의할 점은 공룡능선의 횡단은 될 수 있는 대로 정해진 시간에 끝내라는 것. 충분한 여유를 갖고 하라는 것 등이다. 누구나 시간을 잘 활용하면 횡단할 수 있지만 거기에는 충분한 사전 배려가 필요하다. 강풍이 불거나 눈이 오거나 폭우가 내릴 때는 더욱 세심한 산행이 필요하다.
공룡능선의 안부에서 군데군데 우리나라의 계곡중 가장 발달한 봉만미와 암곡미로 점철된 천불동의 경관을 내려다 보며 걸을 수 있다는다는 것은 능선산행을 하는 이들에게 가장 잊기어려운 경험이 될 것이다. 능선이 구체적으로 그에게 어떤 느낌을 줄지는 아무도 모른다. 그러나 어떤 사람이건 공룡능선에서 어떤 형태로건 비상한 느낌을 받았다는 생각을 하는 것 같다. 그것이 그들에게 일종의 긍지를 느끼게 하는데 도움을 주는 듯하다. 많은 평범한 그러나 산을 좋아하는 서민들이 공룡능선을 갔다온 것을 은근히 자랑으로 여기는 것만 봐도 그것은 증명이 되는 셈이다.
눈앞에 전개되는 원뿔들의 행진을 보고만 있을 수는 없었다. 시간이 자꾸 흘러가고 있었다. 마등령에 6시에 도착한 것은 그나마 다행이었다. 원뿔들을 둘러가는 길은 없었다. 원뿔의 정상에 가까운 곳에 작은 안부가 있었다. 공룡능선의 능선봉들을 넘는 길이 대부분 그랬다. 마등령: 설악산에서 대청봉과 공룡능선, 범봉등을 한꺼번에 조망할 수 있는 곳으로 마등령만한 곳이 없을 것이다. 공룡능선에 이어 마등령을 내려가면서 대청봉을 배경으로 바라본 외설악일대는 다시 한번 사람의 넋을 빼놓기가 일쑤다. 첨봉들이 앞서고 뒤에 뒷그늘에 밝은 화채-대청능선이 유장하게 뻗어 있는 것을 보면 설악의 품의 다양함에 놀랄 수밖에 없다. 설악동에 8시에 도착. 12시간 산행. (10월 9일)